“전 재산 털었는데…” 최근 전해진 한기범의 충격적인 근황에 모두가 눈물지은 이유…김영희와의 안타까운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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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라는 스포츠의 프로 선수들은 다른 스포츠에 비해 키가 큰 사람들이 많습니다.

(KBL(한국프로농구연맹) 주전 선수들의 평균 키는 195cm라고 합니다)

이처럼 프로 농구 선수들이 키가 큰 이유는 농구가 키가 큰 사람에게 유리한 운동이기 때문인데요.

하승진, 서장훈, 김병오 선수 등이 등장하기 전 2m 5cm에 달하는 큰 키를 이용해 한국 농구 최장신 선수로 맹활약했던 레전드 선수가 있습니다.

바로 한기범 선수인데요.

그런 그의 최근 심각한 근황이 들려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최근 전 재산을 잃고, 월셋방에서 살게 되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로 인해 아이들에게까지 장애가 왔다며 “인생이 참 힘든 것 같다”라고 말하는 한기범 선수…

그의 소식에 생활고에 시달리다 고독사한 김영희를 떠올리며 걱정하는 네티즌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남다른 어린 시절과 전성기

한기범의 어린 시절은 태어났을 때부터 남달랐다고 하는데요. 

그는 “날 때부터 너무 성장이 빨라 아동복을 입어볼 새 없이 곧바로 성인복을 입어야 했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농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고향인 천안에서 농구를 하다 너무 힘들어 중도에 농구를 포기하고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간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 농구부를 창단한 명지고등학교에서 “우리 고등학교로 진학해라. 다시 농구를 해보자”며 한기범을 설득한 끝에,  

다시 한번 농구선수로의 꿈을 꾸게 됩니다.

이후 명지고등학교와 인맥이 있었던 정봉섭 중앙대학교 농구 감독은 1982년 한기범을 스카우트하게 되는데요. 

한기범의 중앙대학교는 대학 5관왕을 기록하고 심지어 농구대잔치에서 대학팀 사상 처음으로 최종 결승전에 진출하며 아직까지도 역대 최강의 대학팀으로 평가받고 있죠. 

당시에 대해 그는 “60~70년대 농구 우승은 연세대와 고려대가 양분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연세대, 고려대의 60년 아성을 무너뜨리고 내리 5연패를 했다”

“그 때 내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아주 센세이션이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한기범은 1986년 대학 졸업 후 실업팀인 기아산업에 입단하며, 프로 무대에 첫 발걸음을 딛었는데요.

김유택, 허재, 강동희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과 함께 농구의 전성기를 열며, 10년간 국가대표 센터로 활약하며 미들슛의 달인으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한기범은 큰 키 때문에 잦은 부상에 시달렸고, 진통제까지 맞아가면서 뛰었지면 결국 96/97 농구대잔치를 끝으로 짧은 전성기를 마감하게 됩니다. 

한기범은 ” 후회는 전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승을 너무 많이 해서 농구 인생이 모두 기쁨이다”

“후회 없는 농구를 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나에게는 최고의 행복이고 최고의 기쁨이었다”라며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전했습니다.

고통스러운 가정사

은퇴 후 한 동안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그가 최근 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근황과 그동안 밝히지 않았던 비밀에 대해 털어놓았습니다.

대림동 차이나 타운의 다소 허름한 집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기범 씨

우선 그는  “자신이 마르판 증후군을 앓고있다”고 고백했는데요.

마르판 증후군은 심혈관계, 눈, 골격계의 이상을 유발하는 선청성 질환입니다.

대동맥 파열 등 심혈관 질환을 유발하는 굉장히 심각한 질환이라고 합니다. 

유전병이라 아버지와 남동생도 이 질환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질환으로 인해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요.

한기범은 “30대의 젊은 나이에 자신과 같은 병으로 동생을 잃었다”

“제발 60대 까지만이라도 살아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살았다”며 슬퍼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에 대해 자신의 가슴의 흉터를 공개하며

“나도 두 차례나 심장 수술을 받았다”

“병원에서 나도 아버지나 남동생처럼 100% 죽게된다고 말하더라”

“집사람 앞에서 울 수는 없고, 화장실 가서 대성 통곡했다”

“이 때문에 자식을 안 가지려했다”

“자포자기하고 싶었는데 아내가 내게 용기를 줬다” 

“병이 유전되기에 위험한 병을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다행히도 결혼해 낳은 두 아들에게는 이 병이 유전되지 않았다”고 돌이켰습니다.

그는 농구선수 은퇴 후 홈쇼핑과 연계해 키 크는 보조제 등을 파는 사업을 했지만, 이것이 실패하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한기범은 “처음에는 홈쇼핑과 연계해 키 크는 보조제를 팔았다”

“대박이 났는데, 계약이 불리해서 팔면 팔수록 적자인 구조였다”며 당시 상황을 토로했는데요.

한기범인 이후에도 여러 사업을 했지만, 이마저도 모두 실패하게 되면서 농구선수 시절 모았던 모든 돈을 날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 ‘이것 한번 같이 해보자’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집 담보 대출을 받아 사업을 벌였는데 결국 실패하고 집은 경매로 넘어갔다”고 고백했는데요.

이로 인해 한기범 가족은 하루 아침에 거리로 내몰리게 됩니다.

돈이 없어 변변치 않은 월세방으로 이사를 하고 전업주부였던 아내가 생계를 위해 일을 시작하자 그나마 상황이 나아졌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기범에게 닥친 고통스러운 가정사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한기범의 두 아들이 경계성 자폐 스펙트럼을 앓게 된 것입니다. 

한기범은 “어느 날 아내가 큰 애가 경계성 자폐 스펙트럼이라고 하더라”

“큰 애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주변을 서너 바퀴나 돌더라”

“어느 날은 친구도 못 사귀고 가만히 있어 아내가 병원에 데리고 갔다”며 당시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아내 안 씨는 “집이 망하면서 환경이 바뀌니 틱 장애까지 왔다”

“힘들지만, 사랑한다고 북돋워주고 믿어주면서 살고있다”라고 밝혔습니다.

한기범 재단

이후 건강을 되찾은 한기범은 2011년 단 돈 500만원으로 ‘한기범 희망나눔재단’을 설립하게 되는데요.

심장병 어린이에게 수술비 등을 지원하기 위한 재단이라고 합니다.

2008년 사업 실패로 힘들 때 돈이 없어, 그는 한국심장재단에 도움을 요청에 겨우 심장 수술을 받게되었는데, ‘이 은혜를 반드시 갚겠다’는 생각으로 설립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이 재단은 해마다 열리는 자선 경기와 후원금으로 운영된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무려 40명에게 심장병 수술을 지원했다고 하는데요.

심장병 지원은 물론 취약 계층 어린이들을 위해 농구도 무상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우습지만, 50세가 되어서야 적성을 찾은 것 같습니다”

“후원금으로 수술 받은 어린이 부모님께서 ‘우리 아이 인생을 다시 열어주어서 감사합니다’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너무나 송구스러울 정도였죠”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라며 지금의 행복을 전했습니다.

최근 세상을 떠난 김영희 씨의 집에 방문해 깜짝 이벤트를 해주는가 하면, 재단 수익금 일부를 전달하기도 했는데요.

그는 김영희 씨의 별세에 대해 “쓸쓸히 혼자서 고독사 비슷하게 했다는 것이 정말 슬프고 마음도 아주 아프다”며 비통한 심경을 밝혔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하고 사업 실패를 하며 전 재산을 잃었음에도 무언가를 베풀기 위한 삶을 사는 한기범 선수의 인생이 너무나 존경스럽네요.

그동안 시련이 많았던 그의 인생에 앞으로는 꽃길만 가득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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