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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이혼문화는 어땠을까? 무려 9년간의 이혼소송의 끝은...

썸에서연애까지 2021. 11. 25.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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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조선시대의 결혼 문화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이혼 문화에 대해서는 매체에서 크게 다루지 않아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조선시대에 이혼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정절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선시대에서 결혼을 깨는 것은 당연히 금기시 되었던 일인 것이지요. 하지만 모르는 두 남녀가 만나서 사는데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는 법. 드물지만 조선시대에도 이혼을 한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1. 조강지처를 버리지 말라.
 
조선시대 풍속화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조선시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 조강지처 (고생을 함께 해온 아내) 는 버려서는 안된다는 엄격한 관념이 있었습니다. 임금이라고 할지라도 조강지처를 버리는 일은 매우 금기시 되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다른 여자에게 빠져서 조강지처를 버린 양반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에는 조강지처를 버린 신하 '조말생' 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말생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부잣집 딸에게 다시 장가들어 풍속을 어지럽혔으므로, 모두가 그와 동료가 되기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러므로 왕이 면직시켰다


이를 보아 유추컨데 첫 아내, 조강지처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다시 결혼을 하는 것은 그 당시에도 심각한 배신행위라 여겼고 모든 이들에게 배척당하는 일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세종실록에도 역시 조강지처와 이혼을 허락하지 않은 기록이 있습니다.

 
"성균관 사성(관직의 한 종류)인 '이미' 가 아내를 버리고 다시 장가들었습니다. 자식이 없다는 이유 때문인데, 그럼에도 아비의 삼년상을 함께 치렀으니 의리상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중략) 도로 동거시키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자식을 낳는 일이 아내의 중요한 덕목이던 조선시대에서도 그것이 아내와 이혼하는 사유가 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위와 같은 기록들로 보건데 아내가 중한 이혼사유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처음 연을 맺었던 조강지처라면 함께 사는 것을 의리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2. 공주, 이혼 당하다!

그러나 드물게는 왕에게 허락을 받아 이혼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연산군의 딸인 휘신공주는 당대의 명문가였던 구씨 집안에 시집을 갔습니다. 구수영의 아들인 구문경과 결혼한 휘신공주는 연산군의 예쁨을 받던 공주였기에 매우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합니다. 왕가와 사돈이 된 구씨 집안 역시 상당한 부와 명예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아는 것처럼 폭군이었던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쫓겨나 폐위 되었습니다. 당연히 연산군의 왕자와 공주들도 모두 폐주의 자식이라는 오명이 붙었습니다. 이에 대해 시아버지인 구수영은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구수영은 새로운 임금인 중종에게 아들의 이혼을 청합니다.

김홍도의 그림, 조선시대 선비

중종실록에는 구수영이 아들의 이혼을 왕에게 요청하고 이를 신하와 왕이 상의하여 허락한 내용이 생생히 적혀있습니다.

신의 아들 구문경은 일찍이 폐왕의 부마가 되었는데, 이제 죄인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절혼하기를 청합니다.

졸지에 왕의 딸에서 친정 몰락 후, 이혼까지 당한 휘신공주는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했을까요! 그런데 당대에도 이것이 옳지 못한 일이라고 여겼던 듯 합니다. 이에 대해 2년 후 한 신하가 중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구문경의 아버지 구수영이 이혼하기를 청한 것은 그 사리를 몰랐던 것이며, 국가에서도 이혼까지 시킬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과거에도 부부된 자는 비록 난신의 자녀가 되었더라도 차마 이별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의 상소가 올라오고 휘신공주의 이혼이 신하들 사이에 논란이 되자, 중종은 휘신공주와 구문경을 다시 재결합시킵니다. 이후 구문경과 휘신공주는 계속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다만 휘신공주는 아버지인 연산군이 폐위된 만큼 공주의 지위는 잃고 그저 '구문경의 처' 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3. 유정기의 9년간의 이혼소송, 그 끝은?!
 
드라마 여인천하

조선 숙종 시대에 유정기라는 양반이 있었습니다. 유정기는 한번 사별을 하고 두번째 부인으로 신태영 이라는 이름의 여인을 본처로 삼았습니다. 그러던 중 유정기는 애첩이 생겨 그 여자를 본처로 삼고자 이혼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왕에게 이혼을 허락해달라고 상소를 올리기까지 합니다.

이혼을 신청하는 상소에는 아내 신태영이 지아비와 시부모를 잘 모시지 않았다, 제사를 정성껏 지내지 않았다 등의 죄목을 적었다고 합니다. 이에 아내 신태영은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빠져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항변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에는 신태영이 유정기의 주장에 대해 항변한 내용이 상세히 적혀있습니다.

영화 춘향전
유정기의 처가 된 지 이제 27년입니다. 무진년 이전에 다섯 자녀를 연이어 낳았고 서로 잘 살아왔으나, 무진년 이후로 유정기가 첩에게 유혹돼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제게 씌워진 죄명은 모두 유정기가 남의 말을 믿고 저를 모함한 것입니다

결국 조정에서는 이혼을 승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정기는 정말로 이혼이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 이후로도 9년간 끈질기게 이혼을 거듭 신청합니다. 현대로 따지자면 9년간 소송을 벌인 셈입니다. 그러나 끝내 유정기는 원하던 이혼을 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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