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을 남짓하거나 혹은 1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안에 우리의 시선을 확 사로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런웨이를 걷는 모델들이죠. 걸음걸이와 표정만으로 브랜드를 어필하기 위해 모델들은 안 보이는 곳에서 늘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오늘 만나볼 이 모델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데뷔했다가 슈퍼모델이 되어 늘 고군분투해왔고 결국 한국을 빛냈는데요. 그 모델의 근황을 함께 알아볼까요?
‘꺽다리’라 놀림당하던 소녀
한혜진은 학창 시절 남들보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 늘 놀림의 대상이었습니다. 아이들은 항상 한혜진을 ‘꺽다리’라고 불렀죠. 한혜진은 ‘제발 키가 작아지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매일 빌었습니다. 키는 성인만 한데 아동복을 입으니 사람들이 쳐다보는 걸 느꼈고 그런 시선 때문에 ‘자신은 키만 크고 못생긴 아이’라는 생각과 광장공포를 갖게 되는데요. 버스나 지하철을 타지 못했고 용돈으로 택시만 타고 다녔죠. 우산으로 큰 키를 가릴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비 오는 날을 가장 좋아하게 됐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168cm까지 자란 한혜진은 교내에서 ‘도장 깨기’ 대상이었는데요. 수업이 끝나면 전교에 있는 모든 남학생으로부터 키 재기 대상이 되었죠. 쉬는 시간만 되면 남학생들은 한혜진과 키를 재려고 한혜진의 반에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그 뒤로 한혜진은 수업 종료 종소리만 들리면 스트레스가 생겼죠. 초등학생임에도 키가 커서 고등학생으로 오해하고 남고생들이 대시도 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177cm를 찍으면서 농구선수나 배구 선수 제의도 받게 되죠.
엄마가 몰래 넣은 지원서로
모델 활동 시작
초등학교 졸업 후에 한혜진은 길거리에서 자주 캐스팅 명함들을 받게 됩니다. ‘내가 좀 특별한 사람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길거리 캐스팅의 여파로 초등학생 때 떨어졌던 자존감과 자신감이 붙기 시작한 한혜진은 모델 학원에 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학원 측에선 한혜진에게 SBS 모델 선발대회 참가 원서를 써보자고 제안합니다.
정작 한혜진은 대회에 나갈 만큼의 열정이 있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혜진의 어머니가 몰래 지원서를 작성하고 제출하게 되죠. 한혜진은 본인도 모르는 새에 서류전형 합격으로 예선에 나가게 됩니다. 예선에 나가기 위해서는 하이힐과 의상이 필요했는데요. 한혜진의 어머니는 모아뒀던 생활비와 비상금으로 한혜진에게 처음 백화점 브랜드 옷을 사줍니다. 한혜진은 지금까지도 그때 산 백화점 정장 투피스를 떠올리면 어머니께 감사한 마음에 눈물을 흘립니다.
예선장에 도착한 한혜진은 벅차오름을 느낍니다. 본인이 세상에서 제일 큰 줄 알았는데 더 큰 사람이 200명 이상 있었던 거죠. 그 광경을 보고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다’라며 위안을 받습니다. 자신보다 큰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됐죠. 초등학생 때 겪었던 시선도 없었고 놀리는 사람도 없었기에 한혜진은 “잘하면 이게 내 직업이 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당시 모델 양성 기관 DCM 실장이었던 김소연은 예선장에서 한혜진을 눈여겨봅니다. 그리고 DCM에 등록하라고 권유하죠.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한혜진은 계속 거절하는데요. 김소연은 한 달 동안 매일 빠짐없이 한혜진에게 전화합니다. ‘모델로 대성할 아이다. 몸이 굉장히 좋고, 큰 키에 두상이 작다. 한혜진은 새로운 세대다.’라며 끈질기게 매달립니다. 김소연의 끈기에 한혜진은 DCM을 다니기 시작했고 모든 서울 컬렉션에 캐스팅됩니다. 17살에 데뷔하여 남성 무대까지 서게 되죠.
해외 진출에 성공한
최초의 한국인 모델
데뷔하자마자 주목을 받은 한혜진은 학생으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힘겨움을 느낍니다. 새벽부터 준비해야 하는 쇼와 학업을 병행하기는 너무 무리였죠. 수천 명 앞에서 속옷을 입고 걸어야 되는 것도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무대만 올라가면 다시 희열을 느낍니다. 엄동설한에도 무대에만 오르면 몸이 확 따뜻해지고 자신이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죠. ‘언젠가 죽는 날이 온다면 여기서 죽고 싶다’라고 생각했죠. ‘나는 여길 떠날 수 없겠구나’라는 확신으로 계속 모델의 길을 걷게 됩니다.
국내에서 톱모델까지 오른 한혜진은 소속사 대표의 권유로 해외를 갔는데요. 해외 진출에 큰 욕심이 없었던 한혜진은 국내에 안주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해외로 안 나가겠다고 몇 달을 버티다가 마지못해 해외 활동을 시작합니다. 방 하나에 2층 침대가 6개씩 있는 숙소에서 생활을 시작했죠. 매니저 개념도 없어서 혼자서 오디션 현장을 다녀야 했습니다. 쇼에 갈 확률이 높아진다는 이유로 하루에 30개씩 되는 오디션 현장을 다녔습니다. 한 끼도 안 먹고 갈 때가 많아서 하루에 3kg씩 살이 빠지곤 했죠.
당시 아시안 모델 수요는 0에 가까웠으나 한혜진은 해외에서 얼마 안 가 30개의 쇼에 서게 됩니다. 완벽하다고 평가받는 비율과 독보적 워킹·표정·포즈·카리스마가 유명 브랜드 쇼의 디자이너들을 사로잡았죠. 구찌 쇼 최초의 한국인 모델, 마이클 코어스 쇼 최초의 한국인 모델, 타미힐피거 쇼 최초의 아시안 모델로 올라섰죠. 안나 수이 쇼에선 아시안 최초로 피날레를 담당합니다. 한국계 모델이 빅쇼에 서면서 이름을 알린 것은 한혜진이 시초인데요. 한혜진은 유일하게 한국에서 나고 자라 성장하여 해외 진출에 성공한 최초의 한국인 모델입니다.
한혜진은 약 4년의 짧은 시간 끝에 한국으로 귀국합니다. 미친듯한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죠. 모델로서 할 수 있는 것도 다 해보고 유명한 쇼도 올랐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혜진은 ‘이제 나에게 남은 게 뭐지?’라는 생각에 잠기죠. 가족이 공항에서 자신을 배웅하는 것이 보기 싫어졌고 가족을 떠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한혜진은 가족 곁에 있어야겠다고 다짐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죠.
모델계 똥 군기 악습철폐 선두주자
과거 모델계는 ‘똥 군기’ 악습이 만연했습니다. 17살에 데뷔한 한혜진 역시 그런 악습을 겪었죠. 한혜진은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혼나거나 맞은 적이 없었고 사고도 안 치던 아이였는데요. 모델 세계에선 괜히 욕을 듣고 트집이 잡혔습니다. 사소한 걸로 한혜진을 가만두지 않는 선배들이 많았죠. 맨날 혼나는 게 일이었습니다. 도시락 늦게 가져왔다고, 끝나고 인사 안 했다고, 먼저 퇴근했다고, 메이크업 두 번 받았다고, 눈썹 하나 더 붙였다고 등 시답지 않은 이유로 한혜진을 괴롭혔죠.
한혜진은 연차가 높아진 뒤 동료 모델이었던 장윤주, 송경아와 똥 군기 악습 철폐에 나섭니다. 장윤주와 송경아는 후배들에게 먼저 다정다감하고 친근하게 대했습니다. 한혜진은 후배들에게 오지랖을 떨지 않고 사사건건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너희 할 거 해라’라는 마인드로 혼자 할 일을 하다가 퇴근을 하는 스타일이었죠. 쇼가 끝나도 무조건 남아서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거나 선배에게 일일이 찾아가 인사를 해야 했던 문화를 한혜진이 없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청와대, 예능 종횡무진
전액 본인 사비로 재능기부
현재 한혜진은 모델 경력이 20년이 넘어 한국 모델계의 실질적 최고참이 됐습니다. 이젠 캐스팅 오디션 심사위원으로 참가하고 있죠. 패션 행사에선 셀러브리티 자격으로 초청되고 있습니다. 예능감도 빛을 발했는데요. <나 혼자 산다>에서 ‘달심’ 캐릭터를 남기며 큰 웃음을 선사했습니다.
한혜진은 2017년 트럼프 전 대통령과 영부인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 방한 때 청와대 공식 만찬에 초청되었습니다. 모델 출신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에 대한 직업적 예우 차원은 물론 한국 모델의 세계 무대 진출을 개척한 공을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잠시 쉴 법도 할 텐데 한혜진은 재능 기부까지 합니다. 코로나19로 취소된 서울 패션 위크를 대신하여 디지털 런웨이를 진행하고 유튜브로 공개하죠. 전액 본인 사비로 세트와 소품을 준비했고 홀로 100벌의 디자이너 의상을 입고 런웨이 세트를 걸었습니다.
모델 활동은 뜸해졌으나 한혜진은 멈추지 않고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자택에 따로 헬스룸이 마련돼있을 정도죠. 식단을 철저히 지키고 복근 운동, 하체 운동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한혜진은 당장 런웨이에 올라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몸매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모델 후배 이현이와 국내 여행기로 근황을 알렸는데요. 모델 시절 겪었던 외로움과 힘듦을 훌훌 털고 늘 자신의 소신대로 쿨하고 유쾌하게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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