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연쇄살인마 찰스 맨슨에 대한 모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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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Manson 1.

 

 

 

경멸하는 눈길로 바라보면 내가 바보로 보일 것이고

 

존경하는 눈길로 바라보면 내가 신으로 보일 것이며

 

대등한 눈길로 바라보면 내게서 너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찰스 맨슨>

 

 

 

Kathleen Maddox는 엄격한 종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났지만, 어린 시절부터 무절제한 생활 속으로 빠져든다. 집을 뛰쳐나와, 매춘을 하고, 절도와 강도짓을 하며 살아가던 그녀는 이후 ‘윌리엄 맨슨’이라는 남자를 만나는데, 그 이전 캐슬린은 16세의 나이로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한 아이를 낳는다. 1934년 11월 12일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태어나게 된 그 사내아이에게는 ‘Charles Manson'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찰스 맨슨이라는 사생아를 낳고나서, 캐슬린은 절도죄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로인해, 찰스 맨슨은 웨스트 버지니아에 있는 이모와 이모부와 함께 살게 된다. 찰스가 살게 된 그 집은 어머니 캐슬린이 어릴 때 살았던 것과 같이, 종교적인 분위기가 엄격한 집안이었다.

 

 

 

 

<찰리 맨슨이 어린 시절 외숙부 부부와 살던 집>

 

 

 

광신적인 크리스천이었던 외숙부 부부는 조카인 찰스를 학대했다. 찰스에게 충분한 식사를 주지도 않았고, 초등학교에는 여자 아이의 치장을 하고 가게 해, 다른 아이들의 괴롭힘을 당하게 한 일도 있었다. 어린 시절, 작고 몸이 자주 아팠던 찰스 맨슨은 조울증과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된다.

 

 

이후 찰스가 7세 때, 감옥에서 나온 어머니 캐슬린에 의해, 찰스는 카톨릭 수도원에 맡겨진다. 하지만, 번번히 수도원에서 도망쳐 나왔던 찰스 맨슨은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한다.

 

 

 

 

<젊은 날의 찰스 맨슨>

 

 

 

찰스 맨슨은 9살 때부터 소년원에 수용되는 것을 시작으로, 강도 강간 절도 사기 등등, 이런저런 범죄를 저지르면서, 어린, 그리고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형무소에서 보내게 된다.

 

 

형무소 안에서 찰스 맨슨은 동성애자인 간수에 의해 성적인 폭행을 당했고, 양성애자인 찰스 맨슨 역시 다른 남자들에게 성적인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한편 찰스 맨슨은 형무소 안에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프로급 기타리스트 정도의 수준을 보였다. 비틀스의 광팬이었던 찰스 맨슨은 자기의 기타 실력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 날의 찰스 맨슨>

 

 

 

1954년, 찰스 맨슨은 '로자리'라는 웨이트레스를 만나 결혼하고, 아들까지 낳았지만, 1958년, 둘은 이혼하게 된다. 그 이후 찰스 맨슨은 계속해서 범죄를 저질렀고, 그로 인한 감옥 생활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1967년 감옥에서 나온 찰스 맨슨은 샌프란시스코로 간다.

 

 

60년대 말, 플라워 무브먼트가 넘쳐흐르던 샌프란시스코는 찰스 맨슨의 운명을 뒤바꿔 놓았다.

 

Charles Manson 2.

 

 

 

 

 

 

<찰스 맨슨>

 

 

 

자기 인생의 중요한 전반부의 절반 정도를 거의 감옥에서 허비했던 찰스 맨슨은 3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샌프란시스코로 흘러 들어갔다. 그런 찰스 맨슨의 주위에 추종자들이 모여들었다. 사회로부터 탈락한, 그래서 인생에 목표가 없었던 젊은 히피들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찰스 맨슨의 이전 거친 삶들을 문제 삼지 않았다. 정서적으로 결함이 있었던 젊은 히피들에게, 찰스 맨슨의 형무소 경력은, 오히려 훈장쯤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해서, 찰스 맨슨은 일단 자기를 따르는 히피들과 사귀면서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

 

 

맨슨은 머리와 수염을 기른다. 자신을 예수 혹은 사탄으로 인식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보통의 인간이 아닌, 뭔가 특별한 인간의 이미지를 연출한 찰스 맨슨은 종말 전쟁, 환경문제, 인종문제 그리고 사랑과 선과 악 등등의 주제를 그럴싸하게 늘어놓음으로써,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런 젊은이들 앞에서 찰스 맨슨은 자기의 주특기라고 할 수 있는 기타를 연주하면서 자기만이 병든 사회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주장을 한다.

 

 

찰스 맨슨은 그만의 카리스마를 발산하면서 그룹의 강력한 리더가 된다. 그 그룹은 더욱 강력한 결속력을 지니게 되는 ‘패밀리’가 된다.

 

 

 

 

 

 

<메리 브루너, 수잔 왓킨스, 셰어>

 

 

 

추종자들은 찰스 맨슨을 흠모하였다. 여신도들은 항상 '교주'와 잠자리를 함께 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해서, 찰스 맨슨은 자기를 따르던 많은 여자들과 난잡한 관계를 갖는다. 그 당시 LSD는 상용해 되고 있었다. 그리고 교주를 상대한다는 것 때문인지, 찰스 맨슨과의 섹스에서 여신도들은 마력까지 느꼈다고 전해진다.

 

 

비단 여자뿐만이 아니라, 찰스 맨슨은 남녀 가릴 것 없이 섹스를 나누기도 하며, '패밀리의 유대강화'에 힘써 나갔다. 그건 다른 멤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로 인해 패밀리 내부에서는 LSD와 혼음이 성행하였다.

 

 

음악과 마약 그리고 난잡한 섹스로 자신의 추종자들을 취하게 한 다음, 찰스 맨슨은 그럴 듯한 말들로, 계속해서 그들을 현혹시켰다. 어느덧, 압도적인 지배력과 카리스마를 쌓아올린 찰스 맨슨은 추종자들을 자기의 뜻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즉, 그의 추종자들은 맨슨의 말 한 마디면 주저하지 않고 살인까지 저지를 정도가 된 것이었다.

 

 

 

 

 

 

<맨슨 패밀리>

 

 

 

사람들은 울타리 속에 모여 산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을 지극히 싫어하는 까닭에, 울타리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자신을 절제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행동했다가는 다른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고, 그 결과 왕따가 되어 울타리 밖으로 추방 당할 테니까.

 

 

하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찰스 맨슨 역시 마찬가지였다. 찰스 맨슨은 남에게 알려지고 싶은 욕망이 보통 사람들의 그것보다 상당히 높았던 것이 확실했다

 

Charles Manson 3.

 

 

 

 

 

 

<찰스 맨슨>

 

 

 

찰스 맨슨은 뮤지션이 되고 싶어 했다. ‘비틀스’나 ‘밥 딜런’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유명해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맨슨은 캘리포니아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그에게 예능적인 재능이 있었던 건 분명했다. 한때 ‘비치 보이스’가 자신의 저택에 찰스 맨슨과 그의 패밀리들을 살게 해 준 적이 있는데, 유명 스타가 그런 대접을 해 준 것을 보면, 그 세계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긴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찰스 맨슨은 레코드도 만들어 보고, 영화 쪽에도 기웃거려 보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스타가 되어보려고 버둥거렸지만, 세상은 만만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찰스 맨슨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패밀리의 주방>

 

 

 

찰스 맨슨의 신도들은 ‘수잔 앗킨스’를 제외하면 범죄 경력이 거의 없는 백인 중산계층 출신의 딸들이 많았고, 그 중에는 몇 명의 어린 아이들도 끼어 있었다. 제대로 된 생활을 할 리가 없었다. 멤버들은 자기들의 부모로부터 원조 받아 패밀리의 생활비에 보탰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 부족했던, 패밀리들은 쓰레기통을 뒤져 자기들의 음식물을 찾는 날도 많았다.

 

 

뮤지션으로 성공하지도 못하고, 불어난 패밀리로 인하여, 맨슨은 패밀리를 거느리고 시미 계곡의 영화 스턴트 대목장(Spahn movie ranch)으로 들어가 원시적인 공동생활을 하게 된다.

 

 

 

 

 

 

<조지 스판, 케시 자일스>

 

 

 

찰스 맨슨과 패밀리들은 자기들의 거처를 제공 받는 조건으로 목장 청소와 함께, 여성 패밀리들은 목장 주인인 80세의 노인, ‘조지 스판’의 섹스 상대가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찰스 맨슨은 '이지 라이더'로 알려진 폭주족과도 우호 관계를 다지려고 한 적이 있는데, 이때에도 그 수단으로 패밀리 내의 여자들이 성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런 가운데 어느덧, 맨슨 패밀리는 40여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들은 이미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포기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리더 찰스 맨슨은 사회에 대한 불만과 망상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찰스 맨슨은 폭력 속으로 빠져 들게 된다.

 

 

1969년 7월, 맨슨은 ‘버나드 크로’라는 흑인 마약 장사꾼의 가슴을 총으로 쏘았다. 크로는 회복되었으나 경찰에 신고하려 하지 않았다.

 

 

그 달말, 맨슨은 보비 뷰솔리일(Bobby Beausoliel), 수잔 앗킨스(Susan Atkins) 그리고 메리 브루너(Mary Brunner)와 함께 ‘개리 힌먼’이라는 음악 관계자를 찾아갔다. 그 남자는 마약을 거래해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는 의혹을 사고있던 남자였다. 맨슨 패밀리는 그 남자를 위협하며 돈을 요구했다. 개리 힌먼은 거절하였다. 저항하던 그는 귀를 잘리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다가 살해되었다. 이것이 맨슨 패밀리의 첫 번째 살인이었다.

 

 

 

 

 

 

<메리 브루너, 그녀는 찰스 맨슨의 아이를 낳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에 '찰스 맨슨'이라는 이름을 알리게 된 사건이 일어난다.

 

 

 

 

<살해된 샤론 테이트>

 

 

 

그날 밤, 무참하게 5명을 살해한 맨슨 패밀리는, 빼앗은 돈을 가지고 자기들의 거처로 돌아간다. 돌아간 그들은 뉴스를 통해, 그때서야 비로소 자기들이 살해한 사람들이 유명인사인 것을 알게 된다. 다른 패밀리들과 함께, 마치 슈퍼볼을 보는 기분으로 LSD와 함께, TV에 둘러 앉아 뉴스를 보면서, 그들은 통쾌해 했다.

 

 

Charles Manson 4.

 

 

 

 

 

 

<샤론 테이트>

 

 

 

 

 

 

<로만 폴란스키, 샤론 테이트>

 

 

 

2003년, 아카데미 감독상은 ‘피아니스트 (The Pianist)’를 연출한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오스카를 받으러 시상식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1977년, 로만 폴란스키는 13살 소녀와 섹스를 한 혐의를 받는다. 그는 이 혐의 사실을 인정하지만, 미국에서 탈출, 파리로 도주한다. 현재까지도 그는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로 LA 검찰로부터 수배중인 상태이다. 사생활면에서 무척이나 자유분방(?)했던 그는 스윙어로도 알려져있다.

 

 

그런 면에서는 부인인 샤론 테이트도 비슷했는데, 남편과 마찬가지로 스윙어로 알려진 그녀는 로만 폴란스키와 결혼하고 나서도 옛애인인 ‘J. 세브링’과 만나면서, 신문 연예란을 장식하기도 했다.

 

 

 

 

 

<제이 세브링, 로만 폴란스키, 샤론 테이트 >

 

 

 

1969년, 로만 폴란스키가 유럽 여행 중으로 런던에 가 있을 때, 샤론 테이트는 자기 집으로 손님들을 초대한다. 아메리칸 폴처 커피 제조회사 사장의 딸인 ‘아비게일 폴거’(헤어 디자이너)와 그녀의 애인인 ‘워지시에치 프라이코스키’(영화제작자) 그리고 J. 세브링이 그들이었다.

 

 

저녁 식사 후, 그들은 사이케델릭 환각제를 사용한다. 조금씩 취해가던 그들은 곧 천국 속을 날아다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지옥 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크렌빈켈, 왓슨, 앗킨스, 카사비앙>

 

 

 

찰스 맨슨은 왕년의 명가수 ‘도리스 데이’의 아들 ‘텔리 멜커’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음악 프로듀서였던 그가 자기의 음악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1969년 8월 8일, 맨슨은 자기의 추종자들인 ‘텍스 왓슨(Tex Watson)’, ‘패트리샤 크렌빈켈(Patricia Krenwinkel)’, ‘수잔 앗킨스(Susan Atkins)’ 그리고 ‘린다 카사비앙(Linda Kasabian)’을 텔리 멜커가 살고 있는 집으로 보낸다. 하지만 그 집은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그 당시 그 집은 로만 폴란스키와 그의  부인인 샤론 테이트가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찰스 맨슨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던 맨슨 패밀리는, 샤론 테이트의 집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우선 전화선을 끊는다. 이 과정에서 폴란스키 부부의 집안 일을 돕는 일을 하던 ‘캐전트’라는 청년이 이들을 발견한다. 캐전트는 급히 도망치려고 했으나, 맨슨 패밀리로부터 4발의 총탄과 한 번의 칼질을 당하면서 차 안에서 즉사했다.

 

그리고, 자기들이 습격하려던 집의 주인이 바뀐 걸 알지 못한 상태에서, 맨슨 패밀리가 샤론 테이트의 집안으로 들이닥친다.

 

 

 

 

 

<아비게일 폴거, 워지시에치 프라이코스키>

 

 

 

맨슨 패밀리가 샤론 테이트의 집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들은 마약에 취해있던, 집 안에 있던 사람들 앞에서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샤론 테이트는 임신 8개월의 몸이었다. 샤론 테이트는 뱃속의 아기를 살리고 싶다며 살려달라고 울면서 애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16차례의 칼질을 당한 끝에 살해당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J. 세브링은 돈으로 살아나려 했으나, 총에 한 번 맞고, 칼에 일곱 번 찔려 살해된다.

 

그렇게, 살해당한 샤론 테이트와 J. 세브링은 함께 목이 묶여 천장에 매달려진다.

 

아비게일 폴거는 스물 여덟 차례 칼에 찔렸으며, 워지시에치 프라이코스키는 두발의 총을 맞았고, 머리를 열세 번 칼에 찔렸으며, 51차례나 칼에 찔린 채, 뒤 뜰에 버려진다.

 

 

 

 

Charles Manson 5.

 

 

 

 

 

 

<맨슨 패밀리>

 

 

 

세상이 발칵 뒤집혀졌다. TV에서는 계속해서 샤론 테이트 일행의 참혹한 죽음을 보도하고, 총포상의 총들과 경비견들은 순식간에 팔려 나갔다. 이에, 맨슨 패밀리는 흥분했다.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그들은 자기들의 범죄를 숨기려고 하지 않았고, 죄의식 또한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들의 행위에 대해 대단히 만족해했던 그들이었다.

 

자기들이 저지른 범죄와 그것으로 인해 사회가 긴장하고 동요한다는 사실들을 확인하면서, 패밀리들이 환호성을 질러대던, 그때, 찰스 맨슨은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회를 더욱 긴장 속으로 몰아가려고 했다.

 

 

 

 

 

<레비앵커 부부가 살던 집>

 

 

 

찰스 맨슨은 마약에 취한 패밀리를 이끌고, LA의 고급 주택가를 습격한다. 그 집에는 슈퍼마켓 체인을 경영하던 레노와 로즈마리 레비앵커 부부가 살고 있었다. 침실로 뛰어 들어간 맨슨은 부부를 결박한다. 따라 들어온 그의 부하들은 들고 있던 칼로 그 부부를 찌르기 시작했다. 이 일은 샤론 테이트 일행이 참혹하게 살해된지 불과 하룻만에 벌어졌던 일이다.

 

남편의 몸은 칼과 포크로 엉망이 되었고, 부인은 칼에 41 군데나 찔렸다. 결국 레비앵커 부부는 맨슨 패밀리에게 무자비하게 살해 되었다.

 

살인을 끝낸 살인자들은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 먹기도 하고, 희생자들이 기르던 개에게 먹이까지 준다. 그후, 맨슨 패밀리는 그 집에서 사라졌다.

 

 

 

 

 

<레비앵커의 저택에서 본 전망, 원래 맨슨 패밀리는 레비앵커 부부의 저택 앞 집을 먼저 침입했지만, 그 집은 비어있었고, 그래서 레비앵커 부부의 집을 습격했다는 설도 있다>

 

 

 

처음, 경찰은 맨슨 패밀리가 저지른 일련의 사건들을, 동일범들의 소행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런 관계로 따로 따로 수사에 착수했는데, 서로 정보교환을 거의 하지 않는 등, 각 사건의 수사 관계자들끼리 협조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 맨슨 패밀리에 의해 벌어졌던 사건들은 모두 해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이때, 샤론 테이트의 아버지가 경찰 수사를 도운 일이 있다. 육군 정보 중령이었던 그는 딸이 살해된 후, 퇴역한다. 그리고 4개월여 동안 히피로 위장, 그들의 소굴을 찾아다녀 알게 된 정보들을 경찰에 알려 주었다. 그가 그런 행동까지 한 것은 딸의 죽음에 대한 오해가 많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을 풀어 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찰스 맨슨과 패밀리들은 체포되었다. 하지만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맨슨이 산림 경비대의 불도저에 방화를 했는데, 그 일로 인해 집단생활을 하고 있던 찰스 맨슨과 그의 패밀리들은 모두 경찰에 끌려가게 되었던 것이었다.

 

 

구류기간 중, 아마도 자신을 과시하고픈 것 때문인지, 수잔 앗킨스가 같은 방에 있던 죄수에게 자기들이 한 일을 떠벌이게 되었고, 그 내용은 경찰의 귀로 전달되었다.

 

 

그 이후 아주 오랜 시간과 무척이나 많은 경비가 들어간 재판이 시작된다.

 

 

 

 

 

<찰스 맨슨>

 

 

 

사이코들의 체포 후 열리는 재판. 그 과정을 지켜보다 보면 흥미로워 진다. 그들의 범죄가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던 것만큼 그들의 입에서는 비정상적인 것들이 튀어 나오기 때문이다.

 

 

비록 범죄자였을망정, 비교적 정상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인간들은, 어떻게 보면 얍삽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자기가 저지른 범죄가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확인이 되는 순간부터 자기가 죄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뼛속까지 쓰레기가 아닌, 아직은 인간으로서의 여지가 남아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선처를 바라는 이유일 수도 있다.

 

 

체포 후, 범죄 사실이 밝혀지고 난 후, 열린 재판을 통해서, 맨슨 패밀리는 일단 당당한 모습을 보인다. 재판정에 선 맨슨은 자기들의 행위를 정당화 하려고 했다. 사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강변하면서, 그 책임을 사회 일반에게 전가하려고 발버둥쳤다. 사회는 훨씬 악질적인 일들을 많이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고작 8명밖에 죽이지 않은 자기들의 범죄는 상대적으로 그리 대단치 않다는 논리를 펼치려 했다.

 

 

 

 

 

 

<수잔 앗킨스>

 

 

 

사람을 8명씩이나 살해한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수잔 앗킨스는 직접적으로 이렇게 떠벌였다. 이젠 거의 명언(?)이 되어 버린 말처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네이팜 탄으로 수천 명을 죽인 일은 중요했나요?"

 

 

아마도 그런 말을 하면서, 수잔 앳킨스는 자신의 말이 참으로 그럴 듯 하다고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말을 자기의 입 밖으로 뱉어 내면서 쾌감까지도 느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엄연한 궤변이고, 세상 사람들은 그런 어설픈 궤변에 쉽게 고개를 끄덕거려 주지 않는다.

 

 

'논리가 전혀 없는 단순히 정서가 불안하고 무자비한 자들이 일으킨 어이없는 사회적 반항'

 

 

이것이 그 당시 일반인들이 느끼고 있던 감정이었다.

 

Charles Manson 6.

 

 

 

 

 

 

<찰스 맨슨>

 

 

 

하지만, 찰스 맨슨이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영웅이 된 것도 사실이다.

 

 

세상에는 평범한 일상에 지루해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뭔가 특별한 자극을 꿈꾸는 그들은 선과 악, 미와 추를 구별하려 하지 않는다. 자기들이 피해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찰스 맨슨의 재판이 시작되면서 예상했던 대로 많은 지지자들이 재판장으로 몰려들었다. 재판소 근처에 텐트까지 동원해 먹고 자던 그들은 이마에 십자가를 새기거나, 삭발을 함으로써 맨슨을 지지했다. 또 그들은 담당 검사의 집으로 협박전화를 걸기도 했다. 또 다른 맨슨의 지지자 중에 해군 기지로부터 수류탄과 폭약을 훔쳐서 "Judgement Day(마지막 심판)"라고 일컬어지는 의식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 경찰에 의해 파악되기도 했다.

 

 

 

 

 

 

<텍스 왓슨>

 

 

 

재판 과정에서 맨슨은 자신의 추종자 중의 하나인 텍스 왓슨을 사건의 주동자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오히려 그의 죄상은 더욱 상세하게 밝혀지고 말았다. 맨슨의 패밀리들은, 맨슨이 가담을 한 건 아니지만 그가 "가라"고 했을 때 자기들은 이미 그가 되어 움직였다고 변명했다.

 

 

재판 개시부터 7개월여가 흐른 후, 1971년 1월 25일, 배심원은 맨슨에게 제일급 살인과 살인의 교사로 유죄를 평결했다. 재판에서 맨슨을 포함한 4명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다른 3명은 종신형이 선고되었으며, 여타 멤버들 역시 중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몇몇 패밀리는 검찰 측에 증거를 제공함으로써 기소되지 않았다.

 

 

그 후 맨슨은 국선 변호인을 차례차례로 해임하거나 재판관을 기피하여, 재판의 지연을 꾀했다. 그로인해 재판은 종결까지 10여년의 시간이 걸려야만 했다.

 

 

 

 

 

 

<찰스 맨슨>

 

 

 

찰스 맨슨이 사형을 판결 받은 지 11개월 후인, 1972년 6월 16일 캘리포니아 주에서 사형이 폐지되었다. 그 덕분에 찰스 맨슨은 아직도 죽지 않고 현재도 수감되어 있다. 형무소의 정신 분석의는 찰스 맨슨을 망상형 정신 분열증으로 진단하고 있다.

 

 

경찰은 맨슨 패밀리가 행한 살인의 건수를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찰스 맨슨은 처음 35명을 살해했다고 자랑했지만 정확한 숫자는 입증되지 않았다.

 

 

그는 아홉 번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맨슨은 몇 차례 보석을 신청했으나 모두 기각되었으며, 또한 몇 차례 탈출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맨슨은 아직도 추종자들과 소위 "패밀리" 멤버들과 연락하고 있으며 그들 중 한 명이 미국 대통령 중 한 명의 암살을 시도 하려 한 적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 그는 현재 미국 법률 시스템에 관한 코스로 어느 범죄학 교수에 조력하고 있다고 한다.

 

 

찰스 맨슨은 미국내 다른 어느 수감자들보다 많은 편지를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 웹사이트를 가지게 된 맨슨은 1997년, 가석방 청문회에서 웹사이트 일이 바빠 가석방될 시간이 없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웹상에는 그의 지지자들이 만든 사이트들이 수두룩하다.

 

 

 

 

 

 

<찰스 맨슨과 그의 패밀리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Helter Skelter'>

 

 

 

"이윽고 백인과 흑인이 대전쟁을 일으켜 흑인이 이긴다. 그러나 흑인은 통치 능력이 없는 것이 드러난다. 그 때 초순혈 인종인 맨슨 패밀리가 세계의 정점으로 일어선다."

 

 

처음 개리 힌먼을 살해하면서, 맨슨의 동료 '보비 뷰솔리일'는 시체 옆 벽에 피로 '정치 돼지'라고 갈겨썼다. '블랙 팬서'라는 흑인 테러 조직의 범행인 것처럼 위장하여 경찰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서였다.

 

 

맨슨은 흑인을 미워하였다. 인종편견의 사회학을 스스로 창시하여 패밀리 범죄의 정당화를 시도하면서, 백인을 부추겨 흑인과 싸우게 한 끝에 혁명을 일으키려 하던 인물이었다.

 

 

계속 이어진 범죄를 통해, 샤론 테이트와 그녀의 손님들을 살해하고 나서도 홀의 문에 피로 '돼지'라고 갈겨썼고, 그 이후 래비엔커 부부를 살해했던 현장에서도피로 '돼지에게 죽음을!'이라든가 "헬터 스켈터(Helter Skelter)"라고 갈겨썼다.

 

 

그 당시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맨슨 역시 비틀즈에 심취해 있었고, 누구보다도 비틀즈의 광팬이었다. 맨슨은 비틀즈의 네 멤버를 천사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다섯 번째 천사라고 했다. 화이트 앨범은 자기에게 계시를 내린 것이라고 했다.

 

 

'Helter Skelter'는 비틀즈의 노래 제목이다. 또 '헬터 스켈터'는 흑인에 대해 백인이 궐기할 때 쓸 맨슨의 혁명 암호명이기도 했다. 맨슨은 미국 사회를 변혁하는 혁명을 '헬터 스켈터' 계획이라고 이름 붙였었다.

 

 

 

 

 

 

 

<찰스 맨슨>

 

 

 

찰스 맨슨은 혁명가인가?

 

또 그는 혁명을 위해 그런 온갖 참혹한 범죄를 저질렀던 것일까?

 

 

맨슨 패밀리의 범죄가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맨슨이 기대했던 것처럼 백인은 궐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부의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취급되긴 했으나 맨슨의 범죄는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일으켰다.

 

 

당시 미국정부는 월남전 파병등으로 사회정의를 추락시켰다는 비난을 듣고 있었다. 많은 진보 성향의 사람들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행동했었다. 이런 시기에 벌어졌던 맨슨의 혁명이라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심한 반발심을 조성함으로써, 개혁을 요구하던 진보 진영의 사람들에게까지 타격을 주었다. 이런 까닭에 찰스 맨슨의 사건은 미국 정부에 의해 계획적으로 벌어진 것이라는 음모론까지 나올 정도였다.

 

 

결국, 맨슨의 그것은, 자기의 우월성을 과시하려 하고, 유아독존성을 주장하려고 했던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맨슨은 자기의 망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렸을 뿐이었다.

 

 

찰스 맨슨은 자기가 한 일들을 부정했다.

 

 

 

나는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했던 적은 없다.

 

너희들의 아이가 자신의 나이프로 해치운 것이다.

 

그런 교육을 한 것은 내가 아니고, 너희들이다.

 

-'Charles Manson'

 

 

출처: http://blog.naver.com/bbarksan?Redirect=Log&logNo=60011595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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