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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고 언니들에게 밀리지 않던 핸드볼 유망주의 현재

뉴 선데이서울 2020. 12. 14.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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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리조나 사막에 사는 호피족 이디어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다'

 

 


호피 인디언에게서 유래된 '인디언 기우제'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성향으로 연구되면서 지금은 경제학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성공한 창업가들은 창업의 핵심으로 '자기 확신'을 꼽기도 하는데요.

 

무조건 된다고 믿는 것, 그리고 될 때까지 하는 것이 성공으로 가는 최선의 길이라는 것이지요.

 

 

 

 

 

 

최근 예능프로 '유퀴즈온더블럭'에 출연한 푸드컬처랩 안태양 대표 역시 강한 자기확신을 바탕으로 창업에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창업 초기부터 함께한 친동생은 사업 초반 먹을 것이 없어 굶을 정도로 힘들 때에도 "언니가 된다고 해서 믿었다"라고 할 정도이지요.

 

 

모두가 안될 거라고 한 '김치가루'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는 언니 안태양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요?

 

 

 

 

 

 

 

음식스타트업으로 이름을 알린 안태양 대표는 어린시절 음식이 아니라 운동에 빠져있던 아이였습니다.

 

 

초등학생 때 이미 160cm를 훌쩍 넘는 키에 운동신경도 뛰어나서 핸드볼 선수로 활약한 것.

 

 

재능이 있다고 판단해서 부모님도 전폭 지지했고 안 대표 역시 실업고 언니들과 경기에서 밀리지 않을 정도로 실력을 발휘하면서 핸드볼 선수가 되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훈련 중 갑자기 쓰러지면서 의사에게 "무리한 운동은 그만두라"라는 권고를 받았고 운동밖에 모르던 안 대표는 어색하게 교실 책상에 앉았습니다.

 

 

몸을 부대끼며 훈련하던 운동선수 시절이 익숙하던 안 대표는 친구와 손을 잡고 화장실에 가는 또래 여자아이들에게 적응하지 못했고 초등학교 때 기본기를 놓친 탓에 공부에도 흥미가 없어서 그야말로 아웃사이더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중학교 3년 내내 맨 뒷자리에 앉아서 잠만 자던 안 대표는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당시 안 대표가 살던 경기도 부천은 고입선발고사가 남아있었는데, 성적이 거의 바닥이던 터라 담임교사에게 상고나 특성화고 원서를 내라고 추천받았지요.

 

 

결국 안 대표는 원서접수 마지막 날 어머니까지 모셔와서 담임교사에게 사정을 한 끝에 겨우 인문계 고등학교 원서를 내게 되었는데요.

 

 

 

 

 

 

공부 못하는 딸 때문에 학교에 불려와 통사정을 한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을 갚기 위해서 안 대표는 운동선수 출신 특유의 승부욕을 발휘했습니다.

 

 

선발고사 100일여를 남겨두고 하루 10시간씩 공부했고 초등학교 교과서부터 다시 찾아보며 통째로 암기하는 방식으로 공부했지요.

 

 

덕분에 안 대표는 중학교 내신 성적이 바닥이면서 학력고사 성적은 상위 10%에 드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후 고등학교 시절 안 대표는 모범생의 길을 걸었습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반에서 1등을 도맡았고 전교부회장을 할 정도로 활발했지요. 

 

 

우수한 내신 성적을 바탕으로 수시전형을 활용해 '이화여대 경영학과'에 진학하고 싶다는 목표도 세웠는데, 하필 당해 이대 수시전형 시기가 2학기로 바뀐 상황에서 고3 1학기 중간고사를 망치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졌습니다.

 

 

당시 아버지 사업이 힘들어지는 등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서 학업에 집중하지 못한 것.

 

결과적으로 목표하는 대학이 갈 수 없게 되자 안 대표는 좌절했습니다.

 

 

목표하던 대학과는 멀어졌고 집안형편까지 기울면서 맏딸로서 책임이 무거웠지요.

 

 

 


점수에 맞춰서 서울여대 경영경제학부에 진학한 안 대표는 커피숍, 빵집, 샌드위치가게, 과외수업, 전단지 돌리기, 편의점까지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아르바이트에 매진했습니다.

 

 

늘 열심히 하면서도 늘 도태되는 느낌이었다는 안 대표는 학벌 좋고 집안 좋은 친구들과 취업경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어 '영어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마침 필리핀에 다녀온 친구로부터 영어도 배우고 물가도 싸다는 추천을 받아 2008년 10월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 300만 원을 들고 필리핀으로 떠났지요.

 

 

 

 

 

 

 

필리핀에서 한국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개인과외를 하면서 자신의 영어공부를 이어간 안 대표는 2년여의 어학연수 기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복학할 시기가 찾아왔을 때 새로운 고민에 빠졌습니다.

 

 

첫째로 '26살 나이에 한국으로 돌아가면 2년 더 학교에 다녀 서른이 다 되어서야 취업할 텐데 유학파도 많은 요즘 한국에서 경쟁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것과 둘째로 '막 한류열풍이 불기 시작한 동남아에서 사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아이템이 있지 않을까'라는 것.

 

 

 

 

 

 

 

결국 '한류열풍'이라는 사업적 기회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안 대표는 한국에서 이미 회사에 다니고 있던 동생까지 불러서 '한국음식을 팔아보자'라는 꿈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장사를 시작하기만 하면 무조건 대박이 날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안 대표는 자신이 가진 돈과 동생이 한국에서 보증금에 빼온 돈까지 모두 합해 600만 원을 들여 장사를 준비했습니다. 

 

 

당시 필리핀 마닐라 내 가장 큰 야시장에서 떡볶이를 비롯한 김치찌개, 잡채 등 수십 가지 메뉴를 100인분 만들어 첫날 장사에 나섰는데, 결과는 10시간 넘게 호객행위를 하면서 판 음식이 달랑 2500원짜리 떡볶이 두 접시.

 

 

 

 

 

 

그날 밤 창문도 닫히지 않는 자취방에 돌아온 안 대표는 동생이 들을까 봐 문을 닫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밤새 울었습니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나도록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안 대표는 요식업과 관련한 책을 무작정 읽으면서 공부를 시작했는데요.

 

 

책에서 배운 장사의 첫 번째 비법은 "웃어라"였습니다.

 

손님들에게도 웃고 야시장 상인들에게도 웃으면서 음식 맛이 어떤지 조언을 구하기 시작했는데, 진심이 통한 덕분인지 주변의 진솔한 평가를 듣게 된 안 대표는 수십 가지였던 메뉴를 정리하고 수정을 거듭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필리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한국음식이 아니라 한국드라마와 한국방송에서 본 한국문화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심리라는 것을 깨닫고 장사에 스토리를 첨가했습니다.

 

그저 '최고로 맛있는 떡볶이를 팔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비싼 재료를 사용하고 정성을 들이는 것을 넘어 "당신이 우리 가게에 오면 서울을 경험할 수 있다.

 

 

떡볶이를 먹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 오는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지요.

 

 

 

 

손님들이 200명 넘게 줄을 서기 시작하고 2호점, 3호점 가게를 늘려나가면서 직원까지 뽑아서 사업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브랜드도 필요했습니다.

 

 

안 대표가 없는 가게에서도 음식에 담긴 스토리가 전달되어야 했지요.

 

 

때문에 마케팅이나 브랜딩에 대한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안 대표는 현장에서 마케팅의 중요성을 깨닫고 스스로를 브랜드로 만들었습니다. '서울시스터즈'라는 이름을 걸고 얼굴을 그린 로고를 만들고, 직원들에게는 모두 똑같은 빨간 두건을 쓰도록 했지요.

 

 

 

 

 

 

그 결과 서울시스터즈는 장사를 시작한 지 2년여 만에 8개 매장까지 내고 월 매출 1억 원을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장사 3년 차 안 대표가 매출 흐름도 파악했고 장사가 뭔지 감을 잡았다고 느꼈을 즈음 연 매출 8000억에 이르는 중국기업 GNP트레이딩이 스카우드를 제의했습니다.

 

 

서울시스터즈를 매각하고 동생과 함께 입사하라는 제안이었는데, 사업가로서 '떡볶이장사'를 넘어 진정한 사업가로 거듭나고 싶다는 욕심이 커질 때 찾아온 기회였기에 안 대표는 과감하게 중국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이후 4년간 회사 내 동남아 마스터 프랜차이즈 관련 업무를 맡으면서 안 대표는 필리핀에 오빠치킨과 케이펍BBQ를 론칭해 성공적으로 정착시켰습니다.

 

덕분에 회사 내 입지가 커지고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여전히 안 대표는 자신만의 사업으로 성공하고 싶은 욕심이 컸지요.

 

결국 2016년 12월 필리핀으로 떠난 지 9년 만에 안 대표는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회사에 남겠다는 동생은 두고 혼자 돌아온 안 대표는 프리랜서로 요식업과 동남아 진출 관련 컨설팅을 하면서 자신만의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태국의 스리라차는 가볍고 산뜻해서 여기저기 사용할 수 있지만 한식소스로 가장 유명한 고추장의 경우에는 한두 번 사용하고 냉장고에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들어 보다 접근성이 좋고 효율적인 소스를 개발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김치가루'를 고안한 것.

 

 

 

 

다만 김치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이다 보니 안 대표는 개발 초기 수많은 곳으로부터 "안 될 거다.

 

망할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투자처를 찾는 것은 고사하고 제조업체에서도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대표는 자신의 아이디어에 확신이 있었습니다.

 

 

외국인들에게 K푸드로 가장 유명한 것이 김치이고 '유산균', '감칠맛 나는 매운맛', '건강' 등 긍정적인 이미지가 있다는 걸 알기에 마케팅적으로 가장 수월한 재료라는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비건까지 아우르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젓갈을 빼겠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액젓을 빼고 김치맛을 내는 것이 만만치 않았던 것.

 

이에 온갖 논문을 뒤지고 전국의 식품영양학과 교수님들을 찾아다니며 연구한 끝에 안 대표는 상상하던 맛을 구현해냈습니다.

 

 

2년 만에 완성한 김치시즈닝은  프랑스 정부에서 주관하는 푸드이노베이션 시상식 SLAL에서 은상을 차지하며 인정받았고, 실제 시장에서 아마존 론칭 3일 만에 500개 물량 완판, 시범판매 2주 만에 아마존 시즈닝 부분 판매 1위를 달성했습니다.

 

 

 

 

 

특히 안 대표는 20년 전에 출시되어 이미 세계시장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일본의 시즈닝 제품 '시치미'를 제친 순간을 떠올리며 성공을 실감했다고 회상했는데요.

 

 

"전 세계 부엌 찬장에 우리 제품이 있는 게 꿈"이라는 안 대표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간장으로 일본 제품 '기코만'을 떠올리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우리나라 간장을 세계화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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